못다쓴... 내 첫 사랑 이야기(3)...
이 하숙집으로 이사 온 뒤로 반년동안 내가 매일같이 얼굴을 자주 대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갖다 주는 이집 식모인 선순이 뿐이었다. 그래서 나와 선순이는 동갑나기이기도 하여 서로 반말을 하는 정도가 되었다. 선순이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의 먼 친척 조카딸이었으며 그 이름처럼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학교수업이 끝난 뒤에는 주인집 딸들 보다는 우리 학교가 더 가깝기 때문에 늘... 내가 주인집 딸들보다 먼저 하교해서 마당에서 마음 놓고 씻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운동, 특히 축구를 좋아하던 내가 가끔은 토요일 오후... 학교수업이 끝나고 난 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하숙집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주인집 딸들이 먼저 하교해 집에 와 있으면 수줍음 때문에 마당에 나가는 것을, 조금은 꺼린다는 걸 눈치를 챈 선순이가 그럴 때는... 가끔 세숫물을 미리 떠서, 내방 앞에 갖다 주기도 해 무척 고맙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그 얼마 후부터는 내방에서 내 양말과 세수수건을 걷어다가 깨끗하게 빨고 말려서... 내 방안에 가지런히 갖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아침엔 바빠서 내방을 어지럽혀 놓은 채 학교 가기가 일쑤인데, 내방에 들어와 말끔히 청소도 해 놓고 정리정돈도 해 주었다.
난 그렇게 말없이 몰래 수고 해주는 선순이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내 수줍음 탓에 나는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도 바로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잔인한 봄이라 했던가?...
1960년 4월은 부정선거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의거로 인하여 세상이 뒤바뀌는 큰 변혁을 이루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학교에서는 중상자가 단 한명뿐이었다. 한 녀석이 명동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배에 총알이 관통해 많은 출혈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나와 반은 다르지만 같은 하숙집에 있는 같은 학년의 동급생이어서 나와는 아주 친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고 어찌할줄을 몰랐다. 그런데 마침 명동입구의 미도파 백화점에 근무한다는 어떤 누나가 용감하게 그 녀석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었고... 그 후 이 녀석은 완치되어 은행에 근무하면서 미도파의 그 누나와 결혼했다.
그렇게 잔인한 봄이 가고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던 그해 초여름 어느 토요일 날 오후, 나는 그날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하숙집에는 주인집 딸들이 보이지 않았고 집안은 조용했다. 아마도 인근에 살고 있는 결혼한 큰 언니네 집으로 모두들 놀러 갔나보다. 하숙생들도 고향이 가까운 학생들은 시골 고향으로 내려 가거나 아니면, 토요일 이니까 어디에선가 놀다가 늦게 올 모양인지... 다른 날들과 달리 몹시 조용했다.
나는 얼른 마당으로 나가서 세수를 하고 방안으로 들어와 선순이가 곱게 빨아서 접어놓은 세수수건으로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헌데, 순간 그 수건에서 향수냄새가 진동했다. 난 그때만 해도 비위가 약하여 그런 냄새에 익숙하지 않아서 무척 당황했다.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양말과 세수수건을 빨래해 주는 선순이가 늘 고맙기도 했지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해서 미안하기도 했던 나는, 이 기회에 향수가 싫다는 말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선순이를 만나러 마당 옆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선순아, 양말이랑 수건 빨아줘서 고마운데 난, 향수냄새는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수건에 향수는 뿌리지마. 응?”..........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며 저녁밥을 짓고 있던 선순이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혼잣말처럼 입속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뭐, 내가 그랬나?...”
아마도 무척 무안해서 하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내가 말했다.
“그래, 네가 안 했어도 좋은데, 하여간 향수는 뿌리지마, 응?”.....
그리고 선순이가 계속해서 무안해 할까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얼른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으로 나오는 순간, 주인집 안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주인집 거실마루에 넷째 딸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향수를 싫어하세요?”.....
순간 나는 아주 많이 당황했다. 처음 이 하숙집에 들어오던 날부터 나혼자 마음속으로만 남몰래 좋아하기만 했던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
수줍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나에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양말도... 수건도 제가 빨았구요.....
방 청소도... 책상정리도 모두 제가 했거든요.....
향수도 제가 뿌렸는데요?.....”
아!.....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그 모든 걸 선순이가 한게 아니고... 내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하던 그녀가 나를 위해 손수 해 주었다는 말이 아닌가?.....
들어 내 놓고 그녀를 좋아하던 몇몇 녀석들... 그런데 우리 열세명의 하숙생중에서... 나에게?...
나는 그 순간이 너무도 황홀하여 가슴이 뛰고 호흡이 빨라져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아마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을거다.
지금도 나는 그 뒤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때 내가 어떻게 내방으로 들어 왔었는지를...........................